천지서 15

봄·봄

소월素月이 가꾸어 놓은 잔디 위에 유정裕貞이 그리던 봄 봄은 오는가 장희章熙의 고양이도 사지四肢를 펴고 졸아라 동강난 땅에 통곡하던 상화相和의 봄 봄은 오는가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동지들 맘 속에서까지 사라져가는 아리따운 이들 봄바람에 한결같이 살아 오라 철새의 날개타고 처마 밑에 와 노래하라 목련木蓮 향기 되어 뜰 앞에 풍성하라 계절季節의 주기週期는 한낱 생성生成의 유전流転의 타성惰性 잊어도 미워도 돌아오고야 마는 것 우리가 찾는 그리운 이들 우리가 바라는 그리운 순간들 애타도록 부르짖는 그리운 사연들 낙동강 물줄기 되어 한라산 정기 되어 우리들 혈관 속에 샘처럼 흘러 오라 꽃샘 오솔길로 봄빛 맞아 피어보라 아지랭이 타고 나비 되어 앉아라 조국의 뜰에 실존되어 춤추며 즐겨하라 유영 제2시집 『천지서』1..

천지서 2022.03.24

장미 앞에서

장미 앞에서 찬란한 저 꽃 잎 어느 왕조王朝의 공주가 내 뜰에 찾아와 지금 내 초라함을 웃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못내 풀은 저 서시西施의 어여쁨이 여기 은은한 향기로 맺혀 뿜고 있는가 아니면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원한이 겁劫에 승화昇華 결정結晶되어 이 아침 이슬로 맺혀 아리땁게 피어 있는가 아니면 못다 이룬 내 허황한 꿈들이 추억追憶에나마 빛나고자 한 걸음 앞서 와 찬란히 이 아침을 장식하는가 환상의 불을 켜며 장미는 그저 미소만 보내고 식 향기로 풍성하게 이 하늘에 포화飽和하며 들리지 않는 은근한 말로 속삭이고 속식일 뿐인가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21.06.27

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죽어서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이오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 죽어도 사는 것이라는데 살아도 죽었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오 진짜 죽은 것도 아니어라 진짜 사는 건지 진짜 죽은 건지 도데체 무엇하러 사는 것이며 도데체 무엇하러 살며 죽어야 하는지 살아도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이여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이여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19.02.12

목 단 牧丹

목 단 (牧丹) 찬란한 모란의 폭소(爆笑) 속에서 태양(太陽)은 오수(午睡)에 묻혀 있다 달콤한 태양(太陽)의 오수(午睡)는 찬란한 통일의 꿈 통일은 자주빗 여명(黎明)의 의상(衣裳) 평화의 비둘기를 날린다 푸드득 터지는 모란꽃 놀라 잎을 어루만지는 계절(季節)의 넋 바람은 오월(五月)의 하늘을 펼친다 우산처럼 우산 같은 하늘에 세월 타고 임 찾아 흰구름 뜬다 두둥실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18.10.09

난 초

난 초 네가 부각(浮刻)한 공간에 고향 하늘이 어린다 네가 유도한 시간에 어머니 주름살이 번식한다 지금쯤 누님은 어디서 네 꿈을 어루만지며 야속한 봄을 단장하고 있을까 하늘을 밀고 땅을 갈라 봄을 탄생시킨 네 입맞춤 이제는 분수처럼 생명을 뿜어 여름의 탑을 쌓는다 탑을 돌며 바람은 열띤 원무곡(圓舞曲) 원무곡(圓舞曲)에 맞추어 꽃들의 새 교향곡(交響曲)이 요란하다 요란한 가락 속에 나비는 내일을 나른다 분주하게 희망과 절망을 나른다 봄에서 봄으로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18.09.23

파 도

파 도 파도는 내가 오기 전부터 내가 오기 전 몇 억천만 년 태초의 아침부터 저렇게 외쳤겠지 끊임없이 외쳤겠지 끊임없이 외쳤으련만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바이 없어라 갈매기는 알고 있을까 고래 상어는 알고 있을가 하고많은 흘러간 인류 중에서 알아들은 이 누가 있을까 설마 아담은 알았겠지 알았어도 이브 때문에 잊었으리 소크라테스는 알았을까 호우머 오딧슈우스는 알았을까 알았다면 무슨 소린지 전해 주었으련만 전한 바 없으니 들어보아도 들어보아도 내 알아 들을 바이 없어라 〈컴퓨터〉의 계산으로도 우주 과학의 우주 정복의 분석으로도 해답은 안나올 듯 고기잡이는 그물 치기에 바쁘고 사공은 노 젓기에 넋을 잃고 어린이는 조개 줍기에 여념이 없을 뿐 하찮은 나 물방울 하나 밖에 안되는 나 모기 소리만도 못한 내 목소리 ..

천지서 2018.09.21

낙일초(落日抄)

낙일초 (落日抄) 숨막힘과 억울함에 쫓기어 허덕이며 허덕이며 달려온 오늘이 기진 맥진 영원의 제단 앞에서 찬란하고 장엄한 대단원(大團圓)의 공작춤을 춘다 뉘우치며 뉘우치며 ――― 풀벌레가 이별의 노래를 갈매기가 비탄의 몸부림을 보내고 태양이여 쌓이고 쌓인 수많은 미결(未決)을 수많은 별들에게 인계하기에 오색 찬연한 <테이프>를 끊으며 그대는 미지의 의식에다 내일의 주사위를 던지는가 태양이여 태양이여 이 밤사 또 내 비둘기는 어느 목을 더둠어 찢긴 날개를 어루만지며 이 찔긴 어둠을 달래라는 것인가?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18.08.13

바 다

바 다 뭍으로 달려갔다 달려갔다는 되돌아 오고 또 달려갔다는 또 되돌아 온다 바다는 영원의 시지프스 태초의 아침부터 물에 오르고자 몸부림치다가는 밀려 돌아온다 바다는 이윽고 변신 구름으로 날라 비로 뭍에 내여 보나 결국은 또 쫓겨 돌아온다 무슨 죄인지는 알 바이 없으나 바다는 영원의 시지프스 울며불며 몸부림쳐 오르다가는 만신 창이 다시 제 품으로 돌아온다 영원히 바다는 제자리걸음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18.06.26

비를 맞으면

비를 맞으면 비를 맞으면 체념의 채찍에 기절했던 오늘의 생명이 숨을 쉰다 물미는 어둠에 쫓겨 무위(無爲)의 굴종에 갇혔던 어제의 의식이 날개를 편다 비정(非情)에 밟혀 노래를 잃었던 풀들이 춤을 추고 잎 뒤 그늘에서 갈망만 되새기던 청개구리도 사랑을 느끼는 순간 지나는 추녀 밑에서 나 참새처럼 비를 피하며 비로소 세계며 인생이란 역설(逆說)을 더듬는다 비는 상처입은 조국의 정맥을 거두어 바다의 심장을 거쳐 꿈의 구름, 말 없는 동맥으로 겨레의 공해를 정화하는 것 내일 또 우연히 비를 맞으면 나 어느 추녀 밑에서 한 마리 참새 되어 허망의 번개에 쫓기며 역겨운 하늘을 원망할 것인가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18.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