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서

비를 맞으면

yyrf 2018. 6. 25. 17:47

 

 

비를 맞으면

 

비를 맞으면

체념의 채찍에 기절했던

오늘의 생명이 숨을 쉰다

 

물미는 어둠에 쫓겨

무위(無爲)의 굴종에 갇혔던

어제의 의식이 날개를 편다

 

비정(非情)에 밟혀

노래를 잃었던

풀들이 춤을 추고

 

잎 뒤 그늘에서

갈망만 되새기던 청개구리도

사랑을 느끼는 순간

 

지나는 추녀 밑에서 나 참새처럼

비를 피하며 비로소

세계며 인생이란 역설(逆說)을 더듬는다

 

비는 상처입은 조국의 정맥을 거두어

바다의 심장을 거쳐 꿈의 구름, 말 없는 동맥으로

겨레의 공해를 정화하는 것

 

내일 또 우연히 비를 맞으면

나 어느 추녀 밑에서

한 마리 참새 되어 허망의 번개에 쫓기며

역겨운 하늘을 원망할 것인가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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