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서 15

설 악 부 (雪 岳 賦)

설 악 부 (雪 岳 賦) 에델바이스의 애무로 철마다 고와지는 조화(造化)의 기형아(畸形兒) 하늘을 움켜잡고 구름을 분만(分娩)한다 동해(東海)의 추파에도 야유에도 의연 태연 불퇴전의 좌선(坐禪) 머루 다래 먹고 다람쥐 너구리를 달래며 고고(孤高)한 스스로의 꿈에 산다 침묵의 절규가 하늘에 메아리 하여 별 하나 하나에 부딪고는 다시 골짜기의 뭇꽃 뭇새들 노래로 반전(反轉) 이슬이 마르기 전에 목탁에 초탈(超脫)을 울려 창조의 진통을 무량(無量)의 샘으로 흘려 내리는 영악(靈岳) 태양과도 맞서는 강인한 의지 시끄러운 지동설(地動說) 따위야 한낱 선잠에 흘리는 하찮은 헛소리 설악(雪岳)은 미소와 달관(達觀)에 젖는다 세월이라는 영겁의 허수아비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유영 제2시집 『천지서』1975, 중앙출판공사

천지서 2018.04.11

이 한줌 흙

이 한줌 흙 이 한줌 흙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천 년을 헤매었던가 오딧슈우스는 트로이 십 년 전쟁에 또 십 년 바다의 모험을 겪었던가 삼부자 망명 사형수 이십 년에도 단테는 조국과 인류의 노래를 불렀던가 이 한줌 흙 때문에 센트헤레나의 무심한 물결을 만지며 나폴레옹은 고국의 하늘을 저주했던 것 사할린의 교포들은 망향 실의 꿈에 우는 것 이 한줌 흙에서 인생은 나고 이 한줌 흙으로 인생은 간다 이 한줌 흙은 내 조상의 뼈와 얼 내 몸 내 생명 내 조국 내 호흡 내 영혼의 근원이다 이 한줌 흙을 잃지 않고자 누구는 하르빈의 꽃으로 떨어지고 누구는 상해의 별로 떨어진 것 또 수많은 선열들이 초개처럼 몸을 던진 것 그러기에 요동벌에 웅비한 고구려가 소담스럽고 반도로 위축한 신라 이조가 탐탁치 않다 이 한줌 흙을 ..

천지서 2018.04.03

안녕! 그리운 향토(鄕土)여

안녕! 그리운 향토(鄕土)여 ―――수려선(水驪線)에 해가 저문다 ――― 두메 아가씨 짚세기 넋을 깨워 〈하이히일〉의 현대를 몰아온 기적(奇蹟)의 기적(汽笛)은 멎고 반세기(半世紀) 그 숱한 희비극에 막이 내리는가 소박한 관객의 꿈은 흩어지고 홀연히 불이 꺼지는가 안녕! 쇠고랑 차고 왜놈에 끌려 횃독횃독 성냥갑 곳간에 실려가던 오라비 울며불며 남의 나라 이민 가던 외삼촌네 초롱불 역사(驛舍)에서 인절미, 엿을 팔며 서울 간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 양식을 싣고 가 새 양복 새 구두를 사올 아버지를 기다려 잠 못 이루던 꼬마의 무지개 …… 아니 내 꿈 내 청춘을 실어가고 실어오고 내 사랑 내 희망 내 인생을 팔고 사던 숱한 사연들 어둠의 침략, 감격의 해방, 처절의 유혈 진통의 도약(跳躍), 가난과 역경, 죽..

천지서 2018.03.31

귀향(歸鄕)

귀향(歸鄕) 어스름 달을 안고 고향 역에 내리는 순간 산은 돌아앉아 울고 있었다 신경 마비런가? 불러도 못 들은 체 마을은 도사려 한숨만 쉬고 있다 소화 불량에 영양 실조런가? 고향은 저무는 하늘만 바라보며 현실을 앓고 있다 산다랑이 감자를 지고 장에 간 복술이는 〈택시〉위에 지게를 얹어놓고 안에서 거나하게 졸고 왔다고 뻐꾹새는 비창의 〈소나타〉 잠꼬대에도 〈고우 고우〉를 찾더니 순이네는 집을 나간지 한 달 젖먹이가 보채다 병이 났다고 뜸북새는 가냘픈 〈엘레지〉 곗바람에 사태가 나 온 마을이 술렁술렁 〈오야〉는 도주냐 자살이냐 너 나 없이 폭풍 전야라고 개구리는 밤새 혼성 합창의 〈랍소디〉 서울아 서울아 가슴에 날개 돋친 젊은이들 서울행 정거장에 오늘도 〈릴레이〉를 선다고 소쩍새는 예리한 〈솔로〉 어스름..

천지서 2018.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