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12월5일 공지사항
“Congratulations on the award. It is well deserved - I know how much you put into your translation work.”
유영학술재단으로부터 제5회 번역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나라의 심장부에서』의 저자인 쿳시 교수께 이메일을 드렸더니 이런 답장이 왔습니다. (이메일은 더 길지만, 나머지 부분은 그의 다른 소설인 『철의 시대』와 관련된 내용이어서 여기에 옮겨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맞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맞는 것부터 얘기하면, 제가 번역에 많은 시간과 힘을 쏟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소설을 열한 권 번역했고, 거기에 다른 작가들의 것까지 합하면 서른여섯 권을 번역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청년기』와 『서머타임』을 비롯한 다른 소설들을 번역 중이니 이후로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는 제가 보낸 이메일을 읽으며, 자신의 소설을 번역하면서 제가 수없이 질문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있는 현실을 떠올렸을 게 분명합니다. 저는 다른 소설을 번역할 때도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번역할 때는 특히 더 많은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백 개가 넘는 질문을 그에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미안할 정도로 많은 걸 물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번역에 “많은 걸 쏟고 있다”는 그의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well deserved라는 그의 말은 맞지 않는 말인 듯싶습니다. 그의 말과 달리, 저는 번역에 많은 걸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을 받을 “자격”을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제 번역을 돌아볼 때 늘 따라오는 부끄러움과 자괴심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상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품격 있는 번역물을 생산하라는 격려로, 그리고 쿳시의 소설 중 가장 어려운,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소설을 힘겹게 번역한 것에 대한 위로와 격려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사실, 작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 번역작업은 제대로 수행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이 번역상과 관련하여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낸 이유입니다. 그에게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고 가르치고 그에 관한 글을 쓰며, 그와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은 번역에 따르는 막노동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벅차게 만듭니다. 저는 그를 1998년에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의 소설을 번역하면서 많은 걸 배웠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소설을 번역하면 번역할수록 그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에 관한 학술논문을 쓰는 것보다 그의 소설을 번역하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래서 그에 대한 제 나름의 존경심의 표현입니다.
폴 리쾨르는 번역을 가리켜 “힘든 일은 많고 행복한 순간은 잠시”이고 “때로는 고되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박”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번역가는 “언어적 환대”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번역가가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면서 느끼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옳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번역가가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가면서 텍스트의 곳곳을 누비는, 막노동에 가까운 작업에서 때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낯선 외국어를 모국어로 맞는 데서 느끼는 “환대”의 즐거움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환대”의 즐거움은 번역이 끝나 원고가 출판사에 넘겨지고 출판되어 결국 독자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어딘가로 숨어들고 그 자리에 불안감이 들어서게 됩니다. 다른 번역가들처럼, 저도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일을 잘 하지 못하고 늘 불안해하는 머슴(여기에서 ‘머슴’이라는 말은 번역이론가인 수잔 베스넷이 번역가에 대한 서구세계의 낮은 시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servant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처럼, 번역을 마치고 나면 늘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그 불안감은 번역에 대한 사회적, 학문적 냉대나 냉소까지 얹히면 때로 견디기 어려운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기다란 번역물 하나와 짧은 논문 하나를 동일한 것으로 평가하는 학문적 현실이 냉대나 냉소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번역에 대한 냉대와 냉소는 서양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불안감은 번역가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해도 만족스러운 번역물이 나오기 어려울 뿐더러 오역이나 오류가 늘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리쾨르는 번역을 “작가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일과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일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하면서, “작가와 독자라는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번역이란 작가와 독자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번역이란 이상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리쾨르가 말한 “애도(哀悼)의 작업”입니다. 이는 과도한 이상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이따금 저는 리쾨르의 말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그 위안도 잠시일 뿐입니다. 구현하기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니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상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는 않아도, 이상적인 번역을 향한 열망이나 방향성만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쿳시 교수의 발언은 음미할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그는 번역을 “캐비닛을 만드는 기술”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캐비닛을 만드는 것에 대한 확실한 이론도 없고 철학도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캐비닛 제작자가 된다는 이상, 그리고 연장과 목재의 유형과 관련된 몇 가지 기술들을 제외하고는” 기댈 수 있는 이론도, 철학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캐비닛을 만드는 기술은 “관찰과 실천을 통해 습득돼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캐비닛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저는 제가 지금 만드는 캐비닛이 이전의 것보다 좋아졌으면 싶고, 이후에 만드는 것이 제가 “관찰과 실천을 통해” 습득한 기술 덕에 지금까지 만든 것보다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유영학술재단에서 주는 이 과분한 상을 더 좋은 캐비닛을 만들라는 격려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물론이고 편집자(번역자에게 좋은 편집자를 만나는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편집자는 공동번역자라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를 비롯하여 제 번역과 관련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1956년생. 전북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메릴랜드 주립대에서 콘래드의 소설에 관한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하트 재단, 케이프타운대학 학술재단, 풀브라이트 재단의 펠로였고, 케이프타운 대학과 워싱턴 대학의 객원교수를 지냈다. 오브레트의 『호랑이의 아내』, 고디머의 『거짓의 날들』, 콘래드의 『비밀요원』, 응구기의 『한톨의 밀알』,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연을 쫓는 아이』, 쿳시의 『어둠의 땅』, 『야만인을 기다리며』, 『마이클 K』, 『철의 시대』,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추락』, 『소년시절』,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슬로우 맨』,『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등 30여권을 번역했고 『J.M. 쿳시의 대화적 소설』(문화관광부 우수도서), 『문학의 거장들』(한국연구재단 우수도서) 등을 썼다. 전북대 영문과 교수로 전북대학교 학술상을 수상했으며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문학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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