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4회 유영번역상 수상 소감 -김선형 선생님

yyrf 2017. 6. 16. 08:36



2010년12월6일 공지사항



 









 

   언젠가 감히 '번역'을 말했던 졸고에서, 이렇게 여러 분들 앞에 번역가로 서서 말씀 드릴 기회가 오면 고해성사부터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고 말머리를 시작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네요. 번역을 했다고 이렇게 큰 상을 주신다는 게 왠지 얼떨떨하고 실감도 잘 나지 않거니와, 일단 먼저 죄송합니다, 그간 잘못한 일이 많습니다, 무조건 사과부터 하고 무슨 말이든 시작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이런 마음이 번역가가 짊어져야 할 원죄인지 모르겠습니다. 번역가라는 게 참 살벌한 일인 것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차마 알면서 저지르는 게 아닌 탓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앎의 한계와 얄팍한 재주와 비루한 무능을 활자로 기록하고 다니는 셈이니까요.그리고 아직도 저는, 아니 어쩌면 세월이 흐를수록 더, 좋은 번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온 햇수가 쌓이면서 마냥 젊었던 시절과는 달리, 좋고 나쁜 게 뭔지조차 판단을 수월하게 내리기가 점점 더 어렵기도 하고요. 다만 나쁜 번역이 나올 수 있는 선택의 갈림길들이 무한에 수렴하는데 반해, 그 어떤 핑계도 결국 나쁜 번역의 결과물을 변명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만은 잘 알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실의 엄정함은 점점 더 두려워질 뿐이더더군요.


  그래서 수상소감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른 무엇보다 안도감이었습니다. 그것도 땀에 젖은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 한 줄기 같은, 턱, 하고 숨길을 터주는 상쾌한 안도감이었습니다. 저 제가 그간 무서운 줄 모르고 남겼던 족적들이 모두 다 부끄러운 것은 아니구나,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어서 그 점이 참 기뻤습니다. "번역은 터키 카펫의 뒷면"이라든가 하는 말을 보아도, 동서를 막론하고 번역가는 무릇 자긍보다는 자조에 더 익숙한 법입니다. 비판을 들을 각오는 언제나 되어 있었기에 칭찬은 더 생소했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더, 이 노력만으로도 가상하다고 괜찮다고, 따뜻하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이 느낌이 낯설어서, 이 수상이 더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너무나 시의적절한 순간에, 제가 이토록 번역이라는 일에 매달리는 이유를 새삼 기억나게 해 주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텍스트와의 대면은 언제나 변함없이 불안하고 외로우며, 책 한 권을 마감하는 노동은 여전히 고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메아리처럼 떠도는 원전의 의미를 포착하고 다시 언어로 기록하는 작업 속에서 순전한 향유를 누리는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영문학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 온 이브 본포이는 "번역자는 결국 작가에게서 보상을 받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그의 말을 빌자면 "어느 순간 텍스트의 본문에 거스르는 게 아니라, 어느새 원천에, 풍요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한 시작에 자신이 도달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여행에서 번역자는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권리를 얻게 된다" 고 합니다. 물론 저는 이런 이상적인 경지를 아주 가끔 일별할 수 있을 뿐입니다만, 그 찰나의 가능성은 제게 이 일을 계속 해나가게 만들 만큼 매혹적입니다. 문학 텍스트를 번역하는 작업은, 텍스트의 한 줄 한 줄을 회피할 길 없이 마주하는 궁극적인 '읽기'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적 해석이고 향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읽기와 해석의 즐거움은 번역의 고단한 과정에 내재해 있는 무수한 위험과 노동의 괴로움을 상쇄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번역가로서 저는 참으로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인연을 맺은 작가들이 선사한 텍스트의 보람이라면, 차마 불평할 수 없을 만큼 복이 많았으니까요. 브레히트를 영역한 스티브 구치의 표현을 빌자면 번역이란 "아주 매력적인 외국인을 식구들에게 소개시켜야 하는 연애"랍니다. 깊이 파 들어갈수록 매마르지 않는 주이상스를 선사해 준 토니 모리슨, 아이작 아시모프, 실비아 플라스, 닉 혼비, 마가렛 애트우드, 더글러스 애덤스, 오스카 와일드, 카렐 차페크, 그리고 짓궂은 텍스트의 즐거움으로도 모자라 이러한 영광까지 덤으로 준 F. 스콧 핏츠제럴드까지, 그간 참으로 멋진 연애를 하게 해준 제 애인들에게 제일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참을 인자를 그리며 저를 기다려 주시고 모골 송연한 실수들을 꼼꼼하게 짚어내어 주시는 편집자 여러분들 노고에 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또 텍스트와의 연애에 종종 엄마와 아내를 뺏기고도 불평 없은 착한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는 늘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낳아 가르치고 길러주시고 거두어 주신 부모님과 은사님, 삶을 살만하게 만들어 주는 친구들, 그리고 이 모든 넘치는 은혜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짧은 글 맺습니다.


<약력>

1994년 아이작 아시모프의 『골드』를 첫작품으로 번역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재즈』,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그리고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등을 우리말로 옮겨ㅆ다. 르네상스 영시를 공부하여 2006년 서울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영문학과 초빙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