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14회 유영번역상 수상소감

yyrf 2020. 12. 23. 14:12

  제가 제14회 유영번역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며칠 동안은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마냥 들뜬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1회부터 13회까지 심사과정과 결과 등이 차곡차곡 모여 있는 작년 자료집을 우편으로 받고 나니, 이 대단한 분들 이름 사이에 내 이름을 올리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상의 무게가 실감이 납니다. 해를 거듭하며 점점 중요한 상으로 자라온 이 상의 권위에 모자람 없는 번역을 하기 위해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처음 책 번역을 시작한 이래로, 번역이라는 일은 끝없이 배우는 일이고 한없이 겸허해져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번역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고 어떻게 해도 자신할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대체로 번역은 근접재현을 시도할 뿐 결코 완성형이 될 수 없는 불완전한 기획으로 생각되니까요. 당연히 칭찬 같은 것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물을 평가하고 칭찬해주는 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번역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은 기분이었습니다. 하물며 그 상이 제게 주어지다니요.

  좋은 번역의 요건으로 흔히 출발어에 대한 이해와 도착어 구사력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좋은 번역에는 공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고 싶습니다. 일단 번역가는 저자의 의도에 공감하여 무엇을 전하려 하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텍스트 표면의 의미를 넘어서는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손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독자에게 공감하여 어떻게 말하면 독자가 잘 받아들일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헤아림이 없다면 번역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텍스트 구조물 이면을 들여다보고 짐작하고 암시하는 능력은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쉽게 흉내 내지 못할 인간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간소해 보이는 글이라는 매체를 매개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만나 깊이 물들 수 있다는 것.

  <밀크맨>의 화자는 무장투쟁이 한창이던 북아일랜드의 폐쇄적인 공동체에 사는 소녀입니다. 화자는 북아일랜드 해방을 위해 싸우는 무장단체 거물의 관심을 끌고 스토킹을 당하게 되는데요, 은밀하고 집요하게 다가오는 압박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지만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해받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해해주는 사람 없이 고립되어있는 1970년대 북아일랜드의 소녀에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올해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으로 특히 혹독한 한 해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상이 무너지고 생계가 위협받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마저 멀어진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만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서로 위로하고 조금 또 살아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번역이, 그 시공간을 넓히고 공감을 확산하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것에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다시 한번 이 소중한 상을 받게 된 것에 감사드리며 창비 출판사 여러분을 비롯해 출간에 도움 주신 분들,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홍한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