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유영번역상 수상 소감 - 정 영목 선생님(번역가)
2009년12월9일 공지사항
수상 소감
수상 소감도 누가 쓴 걸 번역해서 읽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이 아닌
제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하네요. 그래도 이 일을 계기로 평소에는 안 하던 생각들을 해 보게 됩니다. 아마 이런 것이 상의 힘이겠지요.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번역이 상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에 상을 주는 일이 없는 세월을 살았던 선배
번역가들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번역 일로 상은커녕 칭찬을 받는 상황도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제 번역과 관련되는 분들, 즉 저자, 편집자, 독자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되도록 하지 말자고 생각해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좀 나이가 들면서는, 번역한 책을 찍어내는
데 들어간 나무한테 덜 미안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 정도가 추가된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번역이라는 일 자체도 늘 달고 다니는 약한 감기처럼 대했던 것 같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줄까 조심도 하고, 행여 심해질까 스스로 경계도 하고, 어쨌거나 떼어낼 길은 없으니 어떻게 견디며 같이 잘 살아볼 수 없을까 궁리도 해 왔다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가 하루아침에 변하기야 하겠습니까만, 이렇게 상을 받고
보니 번역 일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조금은 따뜻한 눈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번역은 이런 것이다, 또는 이래야 한다, 하고 한 마디 하는 것이 예의인 줄 압니다. 저라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만, 번역을 생각하면 갈래갈래 한없이 뻗어나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헤매는 제 모습만
보일 뿐, 그 전체를 조망하고 규정하기가 쉽지 않네요. 아직도
오리무중인데,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번역이
엄청나고 대단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번역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늘 약한 감기를 앓는 상태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앓는 느낌과
과정 자체가 저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조금 진단을 해 보자면, 아무래도 이런 앓는 느낌은 제가 번역을 하면서 어떤 긴장을
스스로 만들어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긴장에 의한 스트레스 증후라는
건데, 저는 우선 제 언어로 저자를 굴복시킨다는 생각을 잘 못합니다.
사실 그런 능력도 없고요. 그렇다고 반대로 저자에게 굴복당할 생각도 전혀 없지요. 둘 사이에는 흔히 말하듯이, 별과 별 사이처럼 서로 너무 멀어져서
헤어지지도 않고 너무 가까워져서 합쳐지지도 않는 어떤 이상적인 거리, 그런 팽팽한 긴장과 균형이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긴장된 거리를 어떻게든 확보해보려고 텍스트를 헤집고 다니는 거지요. 그 결과로 탄생한 번역의 언어는 이상적일 경우, 저자의 언어도 아니고
저의 언어도 아닌, 또 어떤 면에서는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잉태된 제3의 언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좀 괴상하고 비주류적인 생각이지요? 그래서, 번역이라는
일로 상을 받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듯이, 저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
게다가 저 자신의 이상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물을 내놓는 사람이 상을 받는 것 또한 뜻밖의 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지금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진심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실제로 일일이 거명하면서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이 정말 많지만, 평소에 고맙다는 말 안 하고 살던 사람이 이 자리를 빌려 그간 하지도 않던 감사의 인사를 하면, 상 받더니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하실까봐 이쯤에서 그만 입을 다물도록 하겠습니다.
< 약력>
1960년생. 서울대학교 영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번역가. 이화여대 번역대학원 겸임교수. 역서로 ?에브리맨?(필립 로스), ?일의 기쁨과 슬픔?(알랭 드 보통), ?책도둑?(마커스 주삭), ?융: 분석 심리학의 창시자?(디어드리 베어), ?통조림 공장 골목?(존 스타인벡) 등.